무법자의 도시
雨天
겸각
2015. 9. 16. 17:48
치적이며 비가 내렸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 마냥 거세게도 내리는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늘이 번쩍이며 어디엔가 번개가 내리꽂혔고 콰르릉 천둥이 짐승의 울음소리라도 되는 것 마냥 으르렁거렸다. 고요한 가게 내부. 그도 그럴 것이 가게는 문을 열지 않았으니. 연화緣和. 새시장 근처의 작달만한 술집은 오늘 장사를 하지 않았다. 몇 개 되지 않는 테이블 위에는 의자가 올려져 있었다. 바로 된 테이블 앞에 앉아 장량은 술잔을 기울였다. 몇 모금이고 독한 술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취하고픈 날인가봐요?"
하이얀 손이 모양 좋게 깎은 복숭아가 담긴 그릇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달디 단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복숭아를 자르며 손에 묻은 과즙을 닦아내며 청화淸華가 말을 건네었다. 그것에 장량은 슬 웃음을 흘렸다.
"그래. 오늘은 퍽 그런 날인가 보지."
"장 오빠."
장 오빠. 화는 언제나 그리 장량을 불렀다. 이름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으며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건만. 언젠가 한 번은 그것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어째서 이름도 아닌 성을 부르느냐하고 물으니 청화는 그게 중요한 것도 아닌데 뭐 어떠냐고 어깨를 으쓱이며 그것에 특별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처음에 그렇게 부르던 것이 그대로 굳어졌을 뿐이라 답했다. 그러나 그것에 작은 이유가 있다는 것을 청화는 말하지 않았다.
"요즘 잠도 제대로 못 잔다며. 괜찮아요?"
"통 잠을 이루지 못 하니 술로라도 달래야하지 않겠어."
조르륵. 술잔에 독주를 따라내곤 빈 병을 내려놓았다. 찰랑이는 술이 담긴 잔을 들어 잔을 비워내었다. 홧홧한 알코올이 목구멍이며 식도를 긁어내려가는 듯 했다. 화가 빈병을 가져가며 새 병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짐짓 단호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하는 것이었다.
"이것까지만이에요! 우리 가게는 오늘 술 더 안 팔아!"
그닥 과음을 할 생각도 없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것까지 비우고 나서도 취하지 않는다면, 오늘은 그런 날인가 보지. 잔에 술을 따르기 위해 병을 집어들자 냉큼 청화가 그 병을 빼앗아갔다. 저가 따라주겠다며 호언장담을 하는데, 필시 그것이 속도를 늦추기 위함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술잔이 채워지는 것을 물끄럼 바라보다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고 길게 빨아들였다 내뱉었다. 청화는 무언가 얘기를 하고 싶어하는 눈치였으나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량은 그것을 그저 기다렸을 뿐이다.
"있잖아요. 오빠…."
간신히 운을 뗀 화는 그 뒤로도 말을 잇지 못 했다. 그리고는 이내 결심이라도 한 양 제 앞에 놓여있던 술잔을 홀랑 가져가 홀짝이며 술을 마셨다. 간간히 량이 손도 대지 않은 복숭아 조각을 우물이며 그렇게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러다 네가 취하겠다. 화."
슬 발갛게 달아오르는 청화의 뺨을 본 장량이 손에 들린 잔을 거두어 가려 했으나 청화는 술잔에 담긴 술을 꼴깍 모두 비워내었다. 새로이 꺼내왔던 병은 벌써 반 병이 비워진 채였다.
"그러니까느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래, 그래. 말 해보렴. 들어주마."
아이라도 어르는 양 다독이듯 말하며 량은 술잔을 하나 더 꺼내어 술을 따랐다. 이대로 두변 저 병 안에 든 술을 모두 비울 기세이니 조금이라도 덜 마시게 하기 위함이었다.
"…올해로 꼭 십년이잖아요. 언니가, 언니가…"
말을 마치지 못하고 끝내에는 조롱조롱 눈물이 맺혔다. 그것은 끝내 떨어지지 않고 화의 손가락에 스몄다. 망울진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낸 화는 말이라도 고르는 듯 우물거렸다. 장량은 그제서야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쓰디 쓴 술을 넘겼다. 도통 손을 뻗지 않던 단 내를 풍기는 복숭아 조각을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말랑한 과육이 달았다.
"애써 언급할 필요 없다. 너까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 너무 신경쓰지 말아라."
그 말에 화는 어물어물 고개를 끄덕였다. 꺼내기 힘든 얘기인 것은 사실이었다. 화는 그것으로 량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전번에 오빠 핸드폰으로 전화를 건 것 말이어요. 사실 누구든지 상관 없었어. 장 오빠는 영 속내를 털어놓지 않으니까아…. 주변 이들이라도 어떤지 궁금하여서 그랬어요."
"네 앞에서 만큼은 언제나 솔직하지 않았던."
"더, 더 속알맹이는 알려주지 않으시는 것. 내가 모를 줄 알구요? 오빠는 항상 그런 식이어요. 동생이람서, 동생이람서…"
"서운했니. 그래서."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오빠는 어떨지 내가 모르겠지마는 적어두 나는 정말 오빠처럼 생각허구 있는데."
"… …."
"약한 모습일랑 보인다구 죽는 것두 아니에요. 오빠가 사 년 전에 죽을 뻔 했을 때 도운 것으로 내게 이리 잘 해주시마는. 그렇게 날을 세우고 감춘다구 내가 모를까. 사 년이에요. 사 년. 오빠를 보아 온 것이."
"벌써 그리 되었나."
"그래요. 벌써 그리 되었어요. 마냥 어렸던 열 여덟 계집 아이가 벌써 스물 둘이 되었구요. 서른이었던 오빠는 서른 넷이 되었지요."
"화."
"그래요. 오빠가 제 이름을 부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 정도는 나두 알아요. 언니 이름이랑 같으니 오죽 부르기가 힘드실까. 그런데 말이어요. 그래도 어찌저찌 지금은 내 이름을 불러주시잖아요? 시간이 지나면 그리 되는 법이에요. 늙은 사람처럼 말 하지마는 그것이 사실인걸. 꼭 십 년이잖아요. 언니도, 아가도. 이제는 쉬게 해주어요. 오빠가 그리 고생하신다며는 참 편히도 있겠어요. 같잖게 듣지 말아요, 부디. 고생이라면 할만큼 했어요. 십 년을 그리 보낸다는게 쉽지 않은 것은 누구라도 알 것이어요."
마지막 조금 남은 술을 량의 잔에 따라준 화는 어서 마시고 가버리라며 기껏 밝은 소릴 내었다. 청화의 말에 장량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만약 그만 둔다고 하여 그것이 바로 되는 것도 아니었으며 장담 또한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술잔을 비워내고 장량은 몸을 일으켰다. 슬 취기가 돌았으나 그렇다고 취한 것은 아니었다. 청화는 우산이라도 가져가라며 말을 건네었으나 장량은 한사코 되었다며 가게를 나섰다. 쏟아지는 비. 그것은 그 동안 내렸던 미적지근한 비와는 달리 퍽 차갑고 비냄새가 진하였다. 찰박이며 물이 튀고 바짓단이며 구두가 젖어들었다. 걸음을 내딛을 때 마다 빗방울이 온 몸을 때렸다. 몇 걸음 떼지도 않아 흠뻑 젖어버린 몸.
가끔 비를 맞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들척하게 들러붙는 옷은 마냥 달갑지는 않았으나 가끔 한 번 씩은 이리 비를 맞곤 했다. 더운 기운을 품고 있는 여름비는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차디 찬 비가 좋더라. 체온이 내려가고 온기를 앗아가는 그것이 참으로 좋더라. 걸음을 옮겼다. 빗속을 걸어가는 걸음이 퍽 느렸다. 그 시간을 음미라도 하듯이.
화. 네 말이 맞단다. 나도 그것을 알고 있지.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단다.
꼭 십 년이야.
…
십 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