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표류기
무제1
겸각
2016. 1. 12. 15:20
시계 바늘이 열 두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작은 원룸은 흐릿한 스탠드 불만이 켜진 채였다. 책상 위에 펼쳐진 책 들을 대충 정리한 임제오가 냉장고로 향했다. 자박자박 차가운 바닥에 발이 닿으며 나는 소리만이 들렸다. 냉장고에서 페트병을 꺼내어 컵에 따랐다. 방은 어두웠지만 그렇다고 아예 안 보일 정도도 아니었다. 컵에 따른 물을 한 모금 마신 임제오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냉장고에 넣어 놓은 물은 너무 차서, 그렇다고 딱히 꺼내놓은 물도 없었기에 다시 컵을 들어 목을 축이려는데 도어락이 눌리는 소리가 났다. 눈에 띄게 흠칫 놀란 임제오는 들고 있던 컵을 떨어뜨렸다. 손에서 떨어진 컵이 바닥에 부딪히고 컵이 깨지며 파편과 컵에 들어있던 물이 쏟아지기까지의 시간이 매우 길게 느껴졌다.
삐삐삐삐삐.
임제오의 시선은 발을 적시는 물과 조각난 컵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임제오가 입술을 깨물었다. 반사적으로 손끝이 덜덜 떨렸다. 도어락이 해제되는 소리가 나고 집 안으로 들어서는 발걸음 소리에 임제오의 표정은 더욱 구겨졌다. 임제오의 귀에는 제 심장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현실에서 아득히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남자, 임성현은 고개를 숙인 임제오의 머리카락을 틀어쥐어 꺾듯이 임제오의 고개를 들게 했다. 임성현에게서는 지독한 술냄새가 났다. 술이라고 입에 대지도 않은 임제오가 취할 것 같은 기분이 들 만큼. 책상 위에 켜진 흐릿한 스탠드 불에 비춰진 임성현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저런, 조심 해야지, 제오야."
임성현은 임제오의 머리를 틀어쥔 것과 달리 다정스럽게 말했다. 임성현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을 꺼내 임제오의 뺨을 느리게 훑었다. 열아홉 소년치고는 하얀 피부가 더욱 창백했다. 임제오의 눈에는 체념이 가득 했다. 어서 이 순간이 지나가길 바라는 눈치였다. 뱀이 지나가듯 흰 피부 위를 쓸던 손이 떨어지나 싶더니 내리치듯 뺨을 휘갈겼다. 윽 소리도 내지 못한 임제오는 이를 악 물었을 뿐이다. 건조한 날씨에 튼 입술은 쉽게 찢어졌다. 붉은 핏망울이 몽글이며 샘솟았다. 피 냄새가 날 정도도 아니었건만 임제오는 피 냄새를 맡았다. 비릿하고 질척한 냄새가 가득했다. 숨을 쉬지 못할 만큼 지독한 냄새였다.
임제오는 덜덜 떨고 있었다. 육식 동물 앞에 선 작은 동물처럼. 흐릿한 빛을 띄던 눈동자는 이미 눈꺼풀에 가려진 지 오래였다. 임성현은 끌끌 혀를 찼다. 임제오의 머리채를 틀어쥔 손에 더 힘을 줘 아래로 끌어 당겼다. 그 바람에 고개를 쳐든 꼴이 된 임제오의 잇새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임성현은 느리게 고개를 숙였다. 코끝이 스칠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임제오는 잠시 숨을 멈췄다. 숨결을 섞기라도 하면 안 되는 것 처럼. 임성현은 임제오의 악 다문 잇새로 손가락을 구겨 넣어 억지로 입을 벌렸다. 손가락이라도 깨물 법 하건만 임제오는 움직임이 없었다. 임성현은 핏망울이 맺힌 아랫입술을 쭉 빨아내고 혀로 훑어냈다. 연인 간의 애무 같은 것이 아니었다. 짐승이 먹이를 두고 장난이라도 치는 것 같았다. 임제오는 그런 임성현의 행동에 허억 하고 숨을 집어삼켰다. 꾹 쥐어진 임제오의 주먹은 힘이 잔뜩 들어가 하얬다.
"도망을 가려면, 좀 제대로 가지 그랬어."
이렇게 어설프게 숨지 말고, 응? 터진 입술을 잘근이던 임성현이 속삭였다. 맞는 말이었다. 임제오가 도망쳐 봤자 갈 곳은 뻔했고 정해져 있었다. 기껏해야 합격한 대학 근처겠지. 멍청하고 미련하고 어리다. 열아홉의 소년이 생각한 도망이란 고작 이런 것이었다. 얼마 걸음을 때지도 못하고 넘어져 버리는 어린 아이처럼 무기력하다. 정든 곳을 떠나며 임제오가 생각한 것은 단순했다. 이렇게나마 도망이라도 친다면 그만 놔주지 않을까, 하는.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폭력 속에 문득 임제오는 열일곱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반팔을 입고 있었으니 아마 여름이었을 것이다. 그래, 여름이었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던 여름이었다. 열일곱은 너무 어렸다. 열아홉보다, 한참이나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