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주의보

여름날

겸각 2017. 11. 19. 23:22









 
 느리게 눈을 깜빡인다. 내리쬐는 한 여름의 태양은 여전히 뜨겁고 후덥지근한 공기가 숨통을 죄었다. 매미가 우는 소리가 아득하니 들렸다. 정자의 나무 바닥에 가만 머리를 대고 누워 눈을 감는다. 그동안 소란스러웠던 것이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조용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여긴 왜 이렇게 덥냐며 투덜댈 것 같은데. 아직 여름은 갈 기미를 안 보이고 방학은 조금 더 남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인데 가슴 한 켠이 허전했다. 그리 길지도 않은 기간이었는데 벌써 정이 들어버리기라도 한 건지. 핸드폰을 들어 성산 고등학교에 간 날 다 같이 찍은 사진을 물끄럼 바라보았다. 묘한 기분이었다. 중학교 삼 학년을 마치고 이곳으로 내려올 때에도 겪은 헤어짐이었는데. 그때는 딱히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곧 괜찮아지겠지. 위로라도 하듯 툭 내뱉곤 다시 눈을 감는다. 


 짧은 낮잠을 자고 눈을 떴을 땐 땀으로 옷이 축축했다. 여긴 바닷바람이 불어서 덜 더울 줄 알았는데. 턱 끝을 따라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쳐내고 몸을 일으켜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에나 들어갈까. 저번에 바다에 들어갔다 여기 앉아 있었을 때가 떠올랐다. 며칠 지나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그때를 잠시 더듬듯 떠올리다 정자를 떠나 천천히 바닷가로 걸음을 옮겼다. 모래사장의 모래는 햇볕에 달궈져 뜨거웠고 바다에서부터 짠내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얕은 파도가 치는 바다의 코 앞까지 도착해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어두고 핸드폰도 그 위에 올려놓는다. 다음에 바다에 올 때는 수건이라도 챙겨 와야지 했는데. 발끝부터 시원한 바닷물이 찰랑였다. 몇 걸음 옮기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바닷물은 발목을 넘어서 정강이께에 출렁였다. 어차피 땀에 젖은 거 조금 더 들어갈까. 파도 소리가 마치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흐릿하게 들렸다. 


 한 걸음, 두 걸음, …. 어깨를 다 덮을 만큼의 깊이에 와서 숨을 들이마시고 머리 끝까지 바다에 잠겼다. 이명도 들리지 않는 완벽한 고요였다. 부족한 숨이 아니라면 영영 이러고 있고 싶을 정도로. 바다가 서서히 체온을 앗아가는 느낌이 선명했다. 아, 이대로 바닷속에 있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나 점점 숨이 막혀서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뭍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무거웠다. 물속에서 움직이기 불편한 건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그랬다. 


 젖어서 달라붙는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고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슬리퍼와 젖은 발에는 이미 모래가 달라붙었다. 물이라도 가져올걸. 평소에는 산책을 다닐 때 물을 한 병을 꼭 챙겨 나왔는데, 오늘은 왜 두고 나왔을까.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모래사장을 벗어나 길을 따라 걷는다. 걸어온 길에는 옷에서 떨어진 물방울들이 점점이 길을 이루었다. 아직 더운 여름날이었지만 바다에 들어갔다 나오니 덥기는커녕 조금 싸늘한 것 같았다. 가을이 오고 나면 이제 바다에도 못 들어가겠네. 아직 가을이 오기까지는 조금 더 덥겠지만.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 웬일로 청아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방학하고부터는 하루가 멀다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 바쁘더니. 

 "… 집에 있었네. 몰랐어."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문질러 말리곤 이리저리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곤 물끄럼 청아를 바라본다. 할 말이 있는 얼굴인데.

 "대학생 오빠들 가서 서운해?"

 그 물음에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 어차피 갈 사람들이었는걸. 몰랐던 것도 아니고."
"거짓말."

 어림도 없다는 듯이, 당연히 거짓말인 걸 안다는 듯이 툭 던져진 말에 정곡을 찔려 괜히 물을 한 컵 마신다. 거짓말을 하기에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처음부터 거짓말은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구태여. 

"… 그 얘긴 됐고. 할 말 있잖아."
"나 하고 싶은 거 있어."
"… 뭐가 하고 싶은데?" 
"메이크업 배우고 싶어. 고등학교 여기서 안 다닐 거야."

 잠시 말없이 소파에 앉아 있는 청아의 얼굴을 바라본다. 

"거기 기숙사도 있어."

 묻지 않았는데도 냉큼 말을 덧붙인다. 열여섯. 하고 싶은 게 있다니 좋은 일이었다. 저야말로 열아홉 여름이 되도록 어떻게 하고 싶은지 결정하지 못했는데. 

 "… 그렇게 해."

 어차피 내 허락이 필요한 게 아니잖아. 덧붙이며 잔뜩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청아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다. 

"… 기숙사는, 생각해 보자."


 침대에 누워 그리다 만 그림을 바라본다. 엄마와 통화를 했을 때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혼자 올려 보내는 게 마음에 걸리네.'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이사를 가자니 엄마, 아빠의 병원은 이제 자리를 잡아서 다 정리하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청경아, 미술. 제대로 배워 볼래?' 그 물음에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제일 좋은 건 제가 청아와 같이 올라가는 거긴 한데. 그게 저한테도 안심되는 일이었다. 안 그래도 미대를 준비해볼까, 하던 차였다. '천천히 생각해봐. 아직 팔월이니까 시간 있잖아.'


 느리게 눈을 감는다. 선택은 늘 어렵다. 아직 팔월이니까 조금 더 고민해 보자. 어차피 올해의 끝은 여기서 맞을 테니까. 단풍이 지는 가을을 지나 눈이 내리는 겨울 즈음에 결정해도 늦지 않을 터다. 아까 짧게 낮잠을 잤는데도 수마가 몰려와 잠 기운에 몸을 맡겼다.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점차 흐려졌다.




*  청경이는 청아와 함께 서울에 올라가 미대를 준비할까 고민 중입니다. 
*  뚜렷이 정해진 것은 없는 상태입니다. 
*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서는 조금 더 고민해보기로 합니다. 
*  아직은 여름이니까, 남은 시간을 잘 보내보려 합니다. 
*  성산 고등학교에서 모두와 함께 찍은 사진은 인화해서 액자에 넣어 책상 위에 올려두었습니다.